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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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는 1969년 쿠데타 이후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이끌었던 국가로, 여러 국명 변경을 거쳐 1977년부터 '사회주의 인민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로 불렸다. 자마히리야는 '대중의 공동 체제'를 의미하며, 카다피는 직접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녹색 서'를 통해 통치 이념을 제시했다. 1970년대부터 테러 지원 등으로 서방 국가들과 적대적 관계를 유지했으며, 경제 제재와 미국의 공습을 받았다. 2000년대 들어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으나, 2011년 아랍의 봄의 영향으로 시작된 내전으로 카다피 정권이 붕괴되었다. 자마히리야는 직접 민주주의를 표방했지만, 카다피가 사실상 최고 지도자였고, 전국 인민 회의가 국가 기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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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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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공식 국명 | 대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국 |
현지 이름 | الجماهيرية العربية الليبية الشعبية الإشتراكية العظمى (알자마히리야 알아라비야 알리비야 앗사비야 알이스티라키야) |
표어 | وحدة ، حرية ، اشتراكية (와흐다, 후리야, 이쉬티라키야) |
표어 설명 | 통일, 자유, 사회주의 |
국가 | الله أكبر (알라는 위대하시다) |
수도 | 트리폴리 |
공용어 | 아랍어 |
종교 | 이슬람교 |
정치 | |
정치 체제 | 자마히리야 |
최고 지도자 | 무아마르 알=카다피 |
전국인민회의 서기장 | 무함마드 아부 알=카심 알=즈와이 |
총인민위원회 서기장 | 바그다디 알=마흐무디 |
역사 | |
건국 시기 | 1969년 |
멸망 시기 | 2011년 |
이전 국가 | 리비아 왕국 |
이후 국가 | 리비아 국민평의회 |
왕정 폐지, 리비아 아랍 공화국 성립 | 1969년 9월 1일 |
대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국으로 이행 | 1977년 |
내전 발발 | 2011년 2월 15일 |
정권 붕괴 | 2011년 8월 23일 |
카다피 사망 | 2011년 10월 20일 |
전 국토 개방 선언, 내전 종결 | 2011년 10월 23일 |
지리 | |
면적 | 1,760,000 제곱킬로미터 (2008년 기준) |
인구 | |
2010년 | 6,550,000명 |
경제 | |
통화 | 리비아 디나르 |
기타 | |
시간대 | +2 |
현재 국가 | 리비아 |
2. 국명
1969년 쿠데타 이후 리비아 아랍 공화국으로 불렸다. 1977년 자마히리야 체제 수립 이후 사회주의 인민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الجماهيرية العربية الليبية الشعبية الإشتراكية|알 자마히리야 알 아라비야 알 리비야 앗 샤비야 알 이쉬티라키야ar)로 변경되었다. 1986년 이후 대사회주의 인민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로 국명을 변경했다. 카다피가 만든 자마히리야는 "대중의 공동 체제"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한국어로는 대 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국 또는 사회주의 인민 리비아 아랍국으로 번역한다. 2004년까지 후자의 명칭을 사용했지만, CIA 월드 팩트북의 명칭 변경에 따라 일본에서도 정식 국명으로 전자의 명칭을 채택했다.
리비아의 국명 변화는 다음과 같다.
기간 | 국명 |
---|---|
1969년 - 1977년 | 리비아 아랍 공화국 |
1977년 - 2004년 | 사회주의 인민 리비아 아랍국 |
2004년 - 2011년 | 대 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국 |
1951년 키레나이카, 트리폴리타니아, 페잔 3개 주 연합 왕국으로 독립한 리비아 연합 왕국(1963년에 연방제가 폐지되어 리비아 왕국으로)의 국왕이자 사누시 교단의 지도자였던 이드리스 1세는, 1969년 9월 1일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주도한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이로써 '''리비아 아랍 공화국'''이 성립되었고, 터키에 체류 중이던 이드리스 1세는 퇴위했다. 카다피는 "혁명지도평의회"를 이끌며 사실상 국가 원수가 되었다.
3. 역사
1973년부터 카다피는 이슬람주의, 사회주의, 나세르주의에 기반한 "문화 혁명"을 시작했고, "자마히리야"라는 독자적인 직접 민주주의를 추진했다. 1977년 3월 2일, "인민 주권 확립 선언"이 발표되면서 리비아 아랍 공화국은 "'''사회주의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국'''"(1986년에 "대(大) 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국"으로 개칭)으로 바뀌었다. 1980년까지 행정 기구와 경제 시스템의 변혁이 이루어졌고, 아랍 사회주의 연합 외에도 혁명지도평의회, 행정 기관, 내각, 국가 원수, 헌법, 사유 경제 등이 폐지·해체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소련과 가까워져 원조를 받았으나,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수많은 테러를 지원하여 미국, 영국 등 서방 국가와 적대했다. 1986년에는 미국 군에 의해 리비아 폭격을 받았고, 1988년에는 팬암기를 폭파했다. 이로 인해 미국으로부터 테러 지원 국가로 지정되었다.
1992년 유엔의 경제 제재를 받았으나,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과 협조 노선을 취하며 2006년 테러 지원 국가 지정에서 해제되었다. 이후 친 아프리카 외교로 전환하여 아프리카 연합국 구상을 내걸고 아프리카 연합 내에서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
2010년 말부터 아랍 혁명이 발생했지만, 2011년 1월 21일 미쓰비시 도쿄 UFJ 은행은 리비아 체제가 굳건하다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2011년 2월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고, 내전으로 이어졌다. NATO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국가와 아랍 국가의 군사 지원으로 8월 23일 수도 트리폴리가 함락되면서 카다피 정권은 붕괴되었다. 카다피파는 수르트로 거점을 옮겨 저항했지만, 10월 20일 카다피가 사망하면서 자마히리야는 종식되었다. 10월 23일 리비아 국민의회는 전국토 해방을 선언했지만, 이후 2014년 리비아 내전으로 이어졌다.
3. 1. 쿠데타와 리비아 아랍 공화국 (1969년 ~ 1977년)
1969년 9월 1일, 무아마르 알 카다피 육군 중장이 이끄는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드리스 1세 국왕을 축출하고 리비아 아랍 공화국을 수립했다. 당시 이드리스 1세는 신병 치료를 위해 터키에 체류 중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터키로 망명해야 했다.[1] 카다피는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를 모델로 삼아 혁명지도평의회를 설치하고, 아랍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했다.[1]
쿠데타 직후, 카다피는 군 총사령관에 올랐고, 스스로 대령으로 승격했다. 그해 11월에는 잠정 헌법을 공포하고 혁명지도평의회 의장에 취임했다. 1969년 9월 1일 리비아 비상 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비상혁명위원장이 되면서 카다피는 총리와 국방장관, 국가평의회 의장(의회 의장)과 국가 원수를 모두 겸직하게 되었다. 비상 혁명위원회는 1977년 3월 2일까지 존속했다.[1]
1972년, 리비아는 이집트, 시리아와 함께 아랍 공화국 연방을 결성했으나, 1977년에 탈퇴했다.[1]
3. 2. 자마히리야 체제 (1977년 ~ 2011년)
1977년 3월 2일, 무아마르 알 카다피는 리비아에 자마히리야 체제 수립을 선언했다. 자마히리야는 직접 민주주의, 아랍 민족주의, 사회주의, 이슬람주의의 영향을 받은 정치 철학을 반영한 정치 체제로서 카다피의 저서 《녹색서(綠色書)》에 기술되어 있다.
1973년부터 카다피는 이슬람주의, 사회주의, 나세르주의에 기반한 국가 건설을 목표로 "문화 혁명"을 시작했고, "자마히리야"라는 독자적인 직접 민주주의를 추진하며 전국인민회의를 설치하고, 『녹색서』를 집필했다. 1977년 3월 2일 전국인민회의는 "인민 주권 확립 선언"을 발표했고, 리비아 아랍 공화국은 폐지되어 "사회주의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국"(1986년에 "대(大) 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국"으로 개칭)으로 이행했다. 이후 1980년까지 행정 기구와 경제 시스템의 변혁이 이루어졌고, 공화국 시대의 일당 독재 정당인 아랍 사회주의 연합 외에도 혁명지도평의회, 행정 기관, 내각, 국가 원수, 헌법, 사유 경제 등이 폐지·해체되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카다피 정권은 미국과 협조 노선을 취했고, 2006년 5월 15일 미국은 리비아와의 국교 정상화를 발표하며 리비아를 테러 지원 국가 지정에서 해제했다. 한편, 카다피는 친 아랍 외교에서 친 아프리카 외교로 전환하여 아프리카 연합국 구상을 내걸고 아프리카 연합 내에서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
2010년 말부터 주변국에서 아랍 혁명이 발생했지만, 2011년 2월 카다피의 사임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카다피는 리비아군과 외국인 용병 부대를 동원하여 중화기 공격을 실시했고, 리비아는 내전 상태에 빠졌다. 초기에는 반체제파가 우세했으나, 정권 측이 반격하여 벵가지 진격 직전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NATO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국가와 아랍 국가가 반체제파를 군사적으로 지원하면서 열세에서 벗어났고, 8월 23일 수도 트리폴리가 함락되면서 카다피 정권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카다피파는 수르트로 거점을 옮겨 저항했지만, 10월 20일 카다피가 사망하면서 자마히리야 체제는 막을 내렸다.
3. 2. 1. 대외 관계
카다피 정권은 반미주의 노선을 취하며 미국과 서방권에 적대적이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수많은 테러를 지원하여, 미국, 영국 등 서방 국가들과 적대 관계를 형성했다.[1]
1986년에는 미국의 공습을 받기도 했다.[1] 1988년 팬암기 폭파 사건으로 미국은 리비아를 테러 지원 국가로 지정했다.
1984년 런던 리비아 대사관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으로 스코틀랜드 야드 소속 경찰관 이본느 플레처가 사망하자, 영국은 리비아와 국교를 단절했다. 1985년에는 트랜스 월드 항공 847편 테러 사건, 아킬레 라우로호 사건, 로마 공항·빈 공항 동시 테러 사건 등 리비아가 연루된 테러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1986년 트랜스 월드 항공 840편 테러 사건 이후, 미국은 리비아를 배후로 지목하고 공습을 감행했다.
이러한 테러 지원으로 1992년 유엔의 경제 제재를 받았으나, 2000년대 들어 2003년 핵 개발 전면 포기, 팬아메리칸 항공기 폭파 사건 용의자 인도 및 희생자 배상 등으로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이루어냈다.
2003년 12월, 핵무기 등 대량 살상 무기 개발을 인정하고 무조건적인 폐기를 표명, IAEA의 사찰을 수용하여 핵무기를 전면 폐기했다.[1] 그러나, 2011년 NATO의 군사 개입을 막지는 못했다.
3. 3. 리비아 내전과 자마히리야 붕괴 (2011년)
2011년 2월 15일, 42년간 리비아를 통치해 온 카다피 정권에 대한 반정부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며 봉기 수준으로 격화되었다. 반카다피 세력은 벵가지를 중심으로 리비아 국가과도위원회를 설립하고 카다피 정권에 맞섰다.[3]
2011년 3월부터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되었고,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2011년 8월, 반카다피 세력이 수도 트리폴리를 장악하였다. 2011년 10월, 반카다피 세력은 카다피의 고향 시르테를 공격했고, 2011년 10월 20일 카다피가 사망하면서 자마히리야는 막을 내렸다.[4]
내전 초기에는 반체제파가 우세했지만,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해 정권 측이 반격에 나섰다. 그러나 NATO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국가와 아랍 국가들의 군사 지원으로 반체제파가 다시 우위를 점했고, 2011년 8월 23일 트리폴리가 함락되면서 40년 이상 지속된 카다피 정권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카다피파는 수르트로 거점을 옮겨 저항했지만, 2011년 10월 20일 카다피가 사망하면서 자마히리야는 완전히 종식되었다. 23일, 리비아 국민의회는 전국토 해방을 선언하며 내전 종식을 알렸지만[4], 이후 2014년 리비아 내전으로 이어졌다.
2011년 3월,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는 2011년 리비아 내전과 관련하여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의 상황"이 "국제 평화 및 안전에 대한 위협"이라고 인정하고, 결의 제1970호 및 1973호를 채택하여 비행 금지 구역을 설정했다.[6]
4. 정치
1977년 이후 리비아는 인민 주권에 기초한 직접 민주제를 표방하며 '''자마히리야'''라는 독특한 정치 체제를 가진 국가였다. 성문 헌법은 없었고, 1977년에 제정된 '''인민 주권 확립 선언'''이 헌법 기능을 대신했다. 이슬람법이 주요 법원(法源)이었다.
1969년부터 일당 독재 체제를 유지하던 아랍 사회주의 연합은 1977년에 해산되었고, 그 권한은 국가 기관으로 이행되었다. 이후 정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리비아는 직접 민주제를 표방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국민 대표로 구성된 의회가 없었지만, 실제로는 전국 인민 회의(General People's Congress)가 설치되어 의회 기능을 대신했다. 의원은 전국 인민 위원회(내각에 해당) 각료 외에도 각 지역, 학교, 직장 등에 설치된 인민 위원회에서 선출되었으며, 2006년에는 약 1000명 정도였다. 리비아에는 법률상 국가 원수가 없었지만, 외국 대사의 신임장 접수는 전국 인민 회의 서기가 담당하여 국가 원수 대행 역할을 수행했다.
18세 이상 모든 성인은 기초 인민 회의에 참가할 의무가 있었고, 회의 기간에는 시내 상점도 문을 닫아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권에 충성하는 일부 국민만이 회의에 참가했고, 토의 내용도 미리 정해져 있어 자유로운 발언은 허용되지 않았다.
총리에 해당하는 직책은 '''전국 인민 위원회 서기'''였으며, 전국 인민 회의에서 선출되었다. 최고 사법 기관은 최고 재판소였고, 그 아래에 고등 재판소, 제1심 재판소가 있었다. 국가 치안 관련 사안은 특별 재판소인 인민 재판소에서 다루었으나, 이후 폐지되었다. 다른 많은 이슬람 국가와 마찬가지로 사형 제도가 있었다.
국내외에는 민주주의 정권 확립을 목표로 하는 '''리비아 민주 운동''', '''리비아 국민 연맹''', 카다피 정권 타도를 목적으로 하는 '''리비아 구제 국민 전선''', 과격파 테러 조직 '''이슬람 순교자 운동''' 등 다양한 반정부 조직이 있었다. 런던을 중심으로 반정부 세력 결집 움직임이 있었지만, 왕당파부터 이슬람 과격파, 민주주의파까지 다양한 의견이 존재했고, 내전 발발 전까지는 반정부 세력의 영향력이 제한적이었다.
4. 1. 최고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는 1969년 9월 1일 혁명 이후 '''혁명 지도자'''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리비아의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자마히리야라는 독특한 정치 체제를 통해 국정을 운영했는데, 표면적으로는 직접 민주주의를 표방했기 때문에 국가 원수가 존재하지 않았다.카다피는 1970년대 중반 이후 공식적인 직함을 맡지 않았기 때문에, 전국 인민 회의와 같은 공식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회의 후 참석자들의 "요청"을 받아 국민에게 "조언"하는 방식으로 사실상의 시정 방침 연설을 했다. 예를 들어, 1990년대 범 아메리카 항공 103편 폭파 사건 용의자 인도 문제로 코피 아난 당시 유엔 사무총장과 회담했을 때, 카다피는 자신에게 용의자를 인도할 권한이 없다고 말했다.
매스 미디어에서는 카다피를 ''카다피 대령''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무아마르 알 카다피#명칭 표기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카다피에게 "리비아국 혁명 지도자 카다피 각하"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2009년 10월, 카다피의 차남 사이프 알 이슬람이 "인민 사회 지도부 종합 조정관"으로 임명되어 유력한 후계자로 떠올랐다.
4. 2. 총인민회의 서기장
총인민회의 서기장은 1977년 이후 카다피 지배하의 리비아에서 헌법상 국가 원수의 지위를 가졌다. 리비아의 주요 입법 기관이자 최고 집행 기관이었으며, 총인민위원회, 장관 또는 총리에 대한 집행 권한을 대부분 위임받았다. 2011년 카다피의 축출로 폐지되었다.재임 기간 | 인물 이미지 | 인물 이름 | 소속 정당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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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회주의 인민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 ||||
1977년 3월 2일 ~ 1979년 3월 2일 | ![]() | 무아마르 카다피 | 무소속 | |
1979년 3월 2일 ~ 1981년 1월 7일 | 압둘 아티 오베이디 | 무소속 | ||
1981년 1월 7일 ~ 1984년 2월 2일 | 무함마드 자루크 라잡 | 무소속 | ||
1984년 2월 15일 ~ 1990년 10월 7일 | 미프타 우스타 우마르 | 무소속 | ||
1990년 10월 7일 ~ 1992년 11월 18일 | 압둘 라자크 사우사 | 무소속 | ||
1992년 11월 18일 ~ 2008년 3월 3일 | 무하마드 자나티 | 무소속 | ||
2008년 3월 3일 ~ 2009년 3월 5일 | 미프타 무하메드 케바 | 무소속 | ||
2009년 3월 5일 ~ 2010년 1월 26일 | 임바레크 샤메크 | 무소속 | ||
2010년 1월 26일 ~ 2011년 8월 23일 | 무함마드 아부 콰심 즈와이 | 무소속 |
5. 군사
자마히리야 체제 하의 리비아군은 육군, 해군, 방공군(공군 부대 포함)으로 구성되었다.[5] 2011년 리비아 내전 당시에는 아프리카 국가에서 온 용병이 주목받았다.[5] 1986년부터 1987년까지 차드 내전에 개입했지만, 토요타 전쟁에서 차드에 패했다.
2011년 리비아 내전에서는 반체제파 리비아 국민평의회와 그 군사 부문 리비아 인민군, 칼리파 하프타르의 리비아 국민군 등 반 카다피 세력과 이를 지원하는 NATO 군 등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지만, 카다피 정권 붕괴로 리비아군은 일단 소멸했다. 이후 리비아 임시 정부에 의해 정규군이 재편성되었다.
항목 | 내용 |
---|---|
군종 | 무장 인민군(육군), 해군, 방공군(공군 부대 포함) |
최연소 병사 | 17세 |
군사비 | 13억달러 (GDP 대비 3.9%) |
- 리비아 해군 함정 목록
당초 핵무기 개발 의혹이 있었으나, 미국 및 영국과의 비밀 협상 끝에 2003년 12월 핵무기 등 대량 살상 무기 개발 사실을 인정하고 즉시, 무조건 폐기 및 IAEA의 사찰 수용을 표명했다. 이후, 미국과의 국교 회복 등 각국과의 관계 개선이 진행되어 2006년에 테러 지원 국가 지정이 해제되었다.
6. 국제 관계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리비아는 수많은 테러를 지원하여 미국, 영국 등 서방 국가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맺었다. 1986년에는 미국군의 공습을 받았고, 1988년에는 팬암기 폭파 사건을 일으켜 유엔으로부터 경제 제재를 받는 등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었다.[1]
1984년 런던 주재 리비아 대사관원이 반정부 시위 중이던 리비아인을 총격하여 영국 경찰관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영국은 리비아와 국교를 단절했다. 1985년에는 트랜스 월드 항공기 납치 사건, 이탈리아 여객선 납치 사건, 로마 및 빈 공항 테러 사건 등이 발생했다. 1986년 트랜스 월드 항공기 폭파 사건 이후, 미국은 리비아를 배후로 지목하고 공습을 감행했다.
2000년대 들어 리비아는 태도를 바꾸어 2003년 핵 개발을 포기하고 팬암기 폭파 사건 관련자 인도 및 희생자 배상에 합의했다. 그 결과 유엔의 경제 제재가 해제되고 서방과의 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했다. 2006년 5월 15일 미국은 리비아와 국교를 정상화하고 테러 지원 국가 지정에서 해제했다.
1972년부터 1977년까지 이집트, 시리아와 아랍 공화국 연방을 결성했으나,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이스라엘 방문을 계기로 해체되었다. 1974년 튀니지와 아랍 이슬람 공화국 수립을 선언했지만 곧 무산되었고, 이후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 1980년 가프사 사건의 배후로 리비아가 지목되었고, 1985년에는 튀니지 국경에 군대를 집결시켜 튀니지를 위협했다.
1965년부터 1979년까지 차드 내전에 개입하여 1973년 아오주 지구를 점령했다. 1978년 이센 하브레를 지원하여 차드 북부를 장악했으나, 1987년 토요타 전쟁에서 패배한 후 철수했다.
2000년대 이후 아프리카 연합 활동에 적극 참여하며 아프리카 합중국 구상을 제안하는 등 아프리카 외교에 주력했다.[1]
리비아는 재외 공관 명칭으로 대사관 대신 '''인민 사무소'''를 사용했으며, 아랍권에는 "관계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2004년 4월부터 일본 주재 인민 사무소 수장으로 특명전권대사에 해당하는 "서기"가 파견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https://web.archive.[...]
[2]
간행물
チュニジアの騒乱は周辺国へ波及するのか BTMU Focus London 本多克幸
http://www.bk.mufg.j[...]
[3]
문서
報道された映像はすべて反政府関係者数人がカメラの前を覆うものであった
[4]
뉴스
リビアの全土解放を宣言 国民評議会
http://www.asahi.com[...]
2011-10-24
[5]
웹사이트
アーカイブされたコピー
http://www.tokyo-np.[...]
2011-02-25
[6]
웹사이트
http://www.unic.or.j[...]
[7]
문서
「依然としてリビア当局による自国民に対する著しい暴力が継続していることを強く非難するとともに,多くの死傷者が出ていることを強く懸念」し、「ムアンマル・アル・カダフィ革命指導者をはじめリビア当局が,リビア国民に対する暴力をただちに停止するよう強く求め」、「今般の決議は,リビア当局に対する国際社会の明確かつ強いメッセージであり,日本国政府は,リビア当局が決議をただちに遵守することを強く求め」るとの
https://www.mofa.go.[...]
[8]
뉴스
AFP通信が24日、ミスラタの医師の話として伝えたところによると、18日以降で109人が死亡、1300人以上が負傷したという。
読売新聞
2011-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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